그가 선종하자 각국의 매스컴에서는 그가 삶을 재조명하며 그의 선종을 안타까워했다. 가난한 자의 친구였던 교황이었으면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한국을 방문하실 때 하기도 했다. 이 말은 고통 받는 이를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곧 방관이나 동조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뉴스를 통해 우리는 고통 받는 전세계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다. 사회적 약자이거나 난민,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계속 강조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특히 종교인으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교회라는 조직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우 검소한 분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장례식도 화려하지 않게 하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 놓았다고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헌신과 따뜻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평가다.
어디에나 어른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따뜻하고 배려심 있고 소외되거나 아픈 자들을 위로하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천주 교회에서 개혁 교회로 나온 오늘날 개신 교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기는 참 힘든 것이 사실이다.
전체 재정의 약 1% 좀 더 쓰는 곳은 5%, 정도 순수한 구제를 위해 개신 교회들은 돈을 사용한다.이렇게 말하면 반성하기 보다는 아니 다른 지역 교회를 돕는 것도 구제고 선교도 구제고 다 구제하고 할 것 같다. 교회가 구제 기관도 아니고 어떻게 더 잘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다 맞는 말이다.
적어도 태도에서, 말에서 "좀 더 교회가 노력해야죠 죄송합니다" 기대해 보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이미 개혁 교회는 성공 지향적인 곳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축복을 더해주셔야 은혜를 더 주셔야 큰 교회 만들죠" 하면서 말이다. 큰 뜻을 품으려 하기 보다는 돈 많은 교회를 꿈꾸는 목사, 장로, 성도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설교로 소외 받은 사람들을 위해 헌금하고 기도하자고 해도 호응이 별로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교회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힘들다.
강 건너 불 구경을 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불행을 재미있게 여기거나, 방관하는 냉정한 태도를 비유적으로 하는 속담이다. 예를 들면 경기가 어려워 많은 사람이 힘들어 하는데 돈 많은 일부 사람들이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니거나 오히려 고가의 자동차나 명품 가방이 더 많이 팔려 나갔다는 뉴스를 듣게 되는 경우처럼 전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사회는 지탄하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은 이런 사람들을 동경하는 듯한 사람도 많아 지고 있는 것 같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교회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사회 참여와 정치 참여 때문에 모든 교회가 함께 의구심과 지탄을 받는 현실에 대해서도 교회가 너무 침묵하므로해서 오해를 키우고 방관한 것이 곧 동조자로 의심 받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침묵은 항상 위험한 것이다. 개신교회 안에는 어른 교회가 없다. 그 큰 어른이 한마디 하면 싸움도 멈추고 말하고 행동하던 것을 모두 멈추고 돌이키고 자숙해야 하는데 그런 어른이 없다.